盧대통령,全대통령 언급한 지강헌 사건 ‘유전무죄 무전유죄’

 

안녕하세요. 오늘은 ‘지강헌 사건’에 대해 포스팅하려고 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을 탄생시킨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 인질극,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지강헌

대한민국 국적으로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입니다. 국민학교만 졸업한 그는 생계를 위해서 주먹질과 도둑질같은 범법 행위들을 저질렀습니다. 이런 그에게도 어릴 적 꿈은 ‘시인’이였는데요.

집안 가정형편과 아버지와 어머니의 무관심으로 그저 국민학교까지 밖에 못 다닌 것은 안타까움을 자아냈습니다. 하지만 결국 상습 절도로 체포되었습니다. 그는 이미 총 전과 11범이였기 때문에 총 17년의 징역을 선고받습니다.

 

유전무죄무전유죄

 

지강헌 사건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시죠? 뜻 말 그대로 돈 있으면 무죄, 없으면 유죄라는 뜻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은 결국 무죄 혹은 가볍게 형량을 받고, 없는 사람은 그대로나 더 많이 받는 걸 내재하고 있습니다.

저 말을 한 ‘지강헌’은 1988년 10월 8일, 영등포교도소에서 이송되던 25명 중 12명이 교도관을 흉기로 찌르고 서울 시내로 잠입한 인원 중 한 명이였습니다.

인질극을 하였기 때문에 흉악범이라는 이미지가 많은데 이들은 원래 잡범이었습니다. 다만 지강헌은 자신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횡령한 ‘전경환'(전두환 막내동생)은 겨우 7년을 선고받고, 실제론 3년 3개월만에 풀려났다는 것에 불만을 갖고 탈출했습니다.

그렇게 탈주범들이 처음 머문 곳은 한 제약회사의 회사원 집이였습니다. 가족을 생각해 어쩔 수 없이 ‘2박3일 계약 동거’를 하게 된 그는 수면제를 탈주범들에게 먹이고 신고를 할까하며 생각을 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 펼쳐집니다.

바로 탈주범과 인질인 회사원이 같이 을 마셨는 것인데요. 술을 마시며 본인들의 사정을 말하며 속내를 털어놓으니 그들이 너무 안타까워 보여 신고까지 손이 안 갔다고 했습니다.

후에 12명 중 끝까지 잡히지 않았던 5명중 4명 ‘지강헌’, ‘안광술’, ‘강영일’, ‘한의철’은 일주일 가까이 숨어지내다 결국 서대문구에 있는 고 씨의 집에 무단으로 침입하여 고 씨의 가족들을 인질로 삼습니다.

당시 나이 :

  • 지강헌 (당시 34세, 1954년생)
  • 안광술 (당시 22세, 1966년생)
  • 강영일 (당시 21세, 1967년생)
  • 한의철 (당시 20세, 1968년생)

 

盧대통령,全대통령 언급한 지강헌 사건 '유전무죄 무전유죄'출처 : kbs

인질로 잡혀있던 고 씨가 새벽 4시 경 탈출해서 신고를 하였고, 곧바로 경찰 천여 명이 집을 포위합니다. 그들은 도망칠 수 있는 승합차를 준비해주면 인질들을 풀어주겠다고 합니다.

일당 중 강영일이 인질을 붙잡고 밖으로 나와 차가 있는 지 확인하고 돌아오는 찰나, 지강헌은 동료 강영일에게을 쏩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수를 하라고 쏜 것이였는데요.

지강헌은 본능적으로 이 많은 경찰들을 뚫고 빠져나가기엔 어린 나이의 탈주범들은 리스크가 크다고 생각했던 것이였죠. 차라리 자수를 하고 감형을 받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강일아, 내가 너 살린다”이렇게 말을 합니다.

이미 이 현장에서 벗어난 김에 자수를 하고 삶을 이어나가라. 라는 뜻이였죠. 그렇게 말하고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총성이 두 번 들립니다. ‘안광술’, ‘한의철’의 자살을 위한 2발의 소리였습니다.

두 명이 죽고나서 체념한 지강헌은 마지막으로 ‘비지스의 홀리데이’를 틀어달라 합니다. 그 노래를 들으며 유리를 목에 찌르고 자살을 기도하게 됩니다. 직후 경찰대원이 집안으로 진입해 인질들을 구출하게 됩니다.

이 때, 지강헌은 다시 유리로 자살을 시도하는데 그걸 본 인질의 비명소리에 인질이 위험하다고 생각한 특공대가 지강헌에게 총알 두 발을 발사합니다. 지강헌은 옆구리와 다리에 맞고 결국 병원에서 수술도 받지 못하고 죽게되며 사건은 마무리됩니다.

당시 인질 및 경찰들이 증언한 바로 그들은 집 하나의 경계선을 두고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고 합니다. 인질에게 총을 겨누며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이 없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테니 참아달라” 면서 인질들을 달래고 배려했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보았을 때 그들은 정말 ‘탈주’가 아닌 ‘방송’ 즉, 본인들의 억울함과 이 사회를 비판을 하기 위한 수단이 필요했던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유념할 점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무죄가 아닌 오히려 굉장히 위험한 인질극을 벌인 ‘강력범죄’라는 것입니다. 다만 지강헌은 7년 실형과 보호감호소(교도소와 별반차이없음)에 10년이라는 추가적인 기간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이 법을 만든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은 7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실제로 3년밖에 살지 않았다는 것은 실제로 국민들을 흔들만한 일리있는 말이였죠.

또한, 지강헌은 그 당시 국민을 위한다는 ‘노태우’ 대통령은 이 자리에 나타나지도 않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그렇게 사회적인 측면에서는 그들의 목소리는 국민들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는 뼈있는 말들이였죠

盧대통령,全대통령 언급한 지강헌 사건 '유전무죄 무전유죄'출처 : jtbc

 

지강헌 사건 여파

사회보호법

이 사건을 기점으로 사회보호법의 단점이 폭로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인 1989년에 사회보호법이 개정되며 보호감호 기간이 7년을 넘지 못하게 고정되었습니다.

그러나 이후에도 시민단체와 보호감호 피해자에 의해 ‘이중처벌’이라는 지적을 받으며 2005년에 역사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사건발생 집

사건이 발생한 집은 사람이 죽은 집이라며 팔리지가 않는 큰 문제를 겪고 있었습니다. 이에 교정당국이 매입해서 교도관들의 대학생 자녀를 위한 교정학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당시 교도관

탈주범 무리들을 호송했던 교도관들은 정직, 해임, 감봉 등의 많은 징계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점들을 보면 깨우침을 주는 것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의 직장을 앗아가는 일이였단 걸 알 수 있습니다.

 

지강헌 무리, 강영일

강영일은 인질범 중 유일한 생존자, 자수범이라고 말씀드렸는데요. 15년구형했는데 선고‘7년’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탈주범들이 머물렀던 5집 중에서 3집이 탄원서를 냈기 때문인데요.

탄원서 내용“처음에는 모두 겁을 먹었지만 자연스레 식사도 커피도 함께 먹었습니다. 마땅히 죄값은 치러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허나, 이들에게서 나쁜 범죄자가 아닌 인간 그리고 후회의 표정이 보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식사 잘 먹었습니다, 신세 많이 지고갑니다, 우리가 떠나면 신고해라.’ 라는 말을 남기고 갔습니다. 이들이 가고 난 후 우리 식구들은 모두 울었습니다. 무엇때문에 흐르는 눈물이었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부디, 이 탄원서를 읽으시고 그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어 희망의 빛으로 세상에 좋은 등대지기가 될 수 있게 도와주시길 간절히 기원합니다.”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죄가 아닌 사람은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 정말 다시 한 번 느껴집니다. 결코 그들이 잘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목소리를 먼저 들어주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하며, 포스팅을 마치겠습니다.

[참고]    치악산 18토막살인사건         한 일본 기업의 횡포 ‘미나마타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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